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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나의 시를 떠밀고 온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너였다. 한 세대가 흐른 후에야, 겨우 그걸 알았다니! 운명이여, 힘겹게 내민 나의 악수를 받아 다오.2017년 여름 두문루에서임동확----------------------------------------------------"그는 여전히 거역하라, 거역하라고 소리 없이 절규하며 / 대한민국에서 그중 가장 힘센 고정관념과 싸우고 있다 / 어떤 사전에도, 명령에도 갇히지 앟는 그의 긍지가 / 풀과 바람, 첨담과 정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뚝 서 있다"- <김수영 문학관> 일부시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어떤 고정관념이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시는 아름다워야 한다. 시는 감동적이어야 한다. 시는 나를 울리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순간, 더 이상 시가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렇지. 시는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이미 사라진지 지 오래. 시에서 어떤 정답을 찾으려 하지는 말자."행여 단단한 각오나 용기 없이는 무작정 빨려 들어갈 뿐인 무인칭의 시간, / 미처 그만이라고 소리칠 새 없이 다가오는 미지의 힘에 그저 이끌려 갈 뿐일, / 그러나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정적이 열리고 있다 / 차라리 나라면 결국엔 이문 남기며 파장하는 골목 시장의 상인들 같은 소란, / 짐짓 자신마저 속고 마는 평화보다 덜컥 거리의 유세를 택할 고요가" - <저녁이 온다> 일부고정관념에 사로잡히다 보면 그 고정관념이 세상의 전부일 때가 있다.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일 뿐, 그의 잘못은 아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는 없다. 그는 미지의 힘에 이끌렸을 뿐, 그 세계가 진리일 수도, 진리일 때도 있다. 그러나, 고정관념은, 움직이지 않는 고관념. 좁은 관념. 자신마저 속고 마는 평화. 그 세계에 그가 있다."검고 힘센 수심의 아가리가 / 입 벌리고 있을 뿐인 사월 바다엔 / 나는 없다, 나를 찾을 길 없다 / 힘없는 시간의 난간마다 펄럭이는 / 빛바랜 노란 리본들만 펄럭일 뿐 / 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오히려 / 결코 피할 수 없는 큰 눈이 깜박일 뿐이다" - <사월의 바다> 일부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오직 그만의 세계에 그는 있다. 그는 그 세계가 전부다. 그 세계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 세계를 건드리는 순간, 그는 폭발할 것이고, 그는 견디지 못할 것이므로. 사람들은 그의 세계를 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세계를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만, 그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세계에는 그만이 전부이므로. "그만 네가 신촌 사거리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연신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통곡하고 있었을 때 // 내가 확신하는 것이라곤 반향 없는 메아리처럼 사라진 너의 뒷등을 오롯이 기억하며 겨우 여기 살아 노래하며 기도하고 있을 뿐 // 정작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간절하게 부르며 거대한 수압 같은 고독과 마주하고 있었을 때" -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일부네가 그를 간절히 부를 때, 그의 세계는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네가 그를 간절히 부르지 않았다면 열리지 않았을 그의 세계. 그의 "고정"된 세계는 이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이 나에게로 와서, 또 너에게로 와서 비로소 희망이 되었다. 그래, 너는 고정관념이 아니지. 그도 고정관념이 아니지. 그는 어쩌면 보편성의 세계. 너는 어쩌면, 개연성의 세계. 나는 너와 그의 연결성. 비로소 그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고, 너의 마음도 열리기 시작하지."맨 얼굴과 맨 얼굴이 한꺼번에 드러나도록, / 처음 만난 이들이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 도발적인 매혹을 뽐내도 큰 흉이 되지 않는 / 축제의 날들을 위하여 복면을 하자 / 불온이 두려워 복면 금지법을 추진하는 나라 / 오랫동안 선량한 시민의 도덕 아래 잠든 괴물이, / 제가 보기에도 무섭고 추악한 악의 본성이 / 온 거리로 뛰어나와 광인처럼 미쳐 날뛰도록, / 단 한 번도 솔직하지 못한 심장이 꿈틀거리도록 / 복면을 하자, 전대미문의 무능에 빠진 자유와 평화가 / 오직 제 의지에 따라 결단하고 결의하는 날들이 오도록, " - <복면> 일부그래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 시작이 되지. 비록, 복면을 하였어도, 드디어시작되는 세계. 그 세계엔 자유와 평화가 있지. 축제의 날을 위해, 복면을 하고 이 세계에 뛰어드는 거야. 그의 세계와 너의 세계, 그리고 나의 세계가 하나로 어우러져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어울러짐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이 될 수 있도록."이윽고 천둥 번개를 몰고 온 한낮의 여름비가 // 불투명한 전망을 노래하는 가수의 등짝을 내리치고 / 화석처럼 무감각해진 혁명의 심장을 가차 없이 내리친 다 // 결코 저항할 수 없는 것엔 저항해선 안 된다고 / 까짓것, 피할 수 없는 천형이야 훌훌 털고 일어서라고" - <소낙비> 일부새로운 세상은 비로소 완벽한 세계. 저항할 수도 없지만, 저항하고 싶지도 않은 세계. 피할 수 없으므로 즐기라고 한 세계. "서둘지는 마. 일주일 전 내가 / 열 알씩 주워 오라고 했던 밤톨들 / 가져 오구. 구워 나눠 먹고 시작할게 // 한참 동안 신나 하던 상상력도, 자유 연상도 / 어느덧 검은 바다로 끌려 들어가고 마는 나라...중략...태풍 끝난 푸른 가을 하늘 좀 올려다봐 //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야. 다음 수업 땐 // 고양이와 낙엽에 관한 시 한 편씩 제출하기" - <야외 수업> 일부시는 꼭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어울리는 시어로 탄생하는 시. 시의 세계. 너와 그와 내가 어우러진 시 세계. 그는 보편성, 너는 개연성, 나는 연결성. 그래, 시는 우리의 세계지. "저 밤바다를 지켜 선 불빛은 / 고독의 탐색, / 고독의 묵시, / 고독의 탐욕, / 여수 서남쪽 멀리 거문도항엔 / 단 한 차례도 제가 원하는 / 수심에 이르지 못한 등댓불이 / 잠시 파도 그친 내해(內海) 깊숙이 / 제 긴 혓바닥을 해초처럼 던져 두고 / 지켜 낼 힘이 없다면 꿈꾸지 않았을 /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독의 탐침, / 결코 흔들리지 않을 고독의 흘수선, / 맑고 선한 고독의 심지를 / 밤새 키워 가고 있다" - <거문도 등대>우리의 세계는 고독한 세계. 고독하지만 우리는 비로소 완전성을 갖춘 세계로 다시 태어나곤 하지. 우리의 고정관념, 그 고정관념의 아름다움. 그리고, 고정관념을 깨 버리는 개연성의 놀라움.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잇는 나의 연결성. 하! 우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마. 그 세계는 고독하니까. 고독을 이해할 때, 깊은 고독을 비로소 느꼈을 때, 우리를 이해하게 될 테니까. 그는 비로소 너를 이해했고, 너는 비로소 나를 이해했고, 나는 비로소 그를 이해했으니까. 우리, 노력 같은 거 하지 말자. 그저, 서로를 받아들이자. 우리의 맑고 선한 고독의 심지를 밤새 키워 가자. 우리의 세상이 저 넓은 세상에 받아들여지도록.
매장시편 이후 30년이 지나 내놓은 아홉 번째 시집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에는 51편의 시가 담겨 있다. 임동확은 1980년 오월의 대환란을 묵시록적으로 기록하여 동시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함께 부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시인은 첫 번째 시집 매장시편 에서 망자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고 있는 삶의 조건들을 직시하고, 망자의 풍경을 기억의 역사 속에 존속시켰다.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을 간절히 부르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채 수장당한 이들의 맨몸이다. 그 부름은 어떤 도덕적 정언 명령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월의 기억을 인출하는 ‘풀려 버린 동공’의 물성으로 다가온다.

시인의 말

1부
운석
안압지의 밤
저녁이 온다
고요는 힘이 세다
이중섭展
김종삼 음악회
김수영 문학관
장항선
시간의 성채-증도 1
시간의 발굴-증도 2
녹두서점-시간의 행로
보라매 공원
가을 음악회

2부
땅끝에서 부르는 노래
첫눈이 왔을 뿐인데
칸나
너의 눈동자
너를 찾아서
사월의 바다
솔베이지의 노래
진혼가-‘4·16 대재난’에 부쳐
눈먼 가수의 노래
돌의 초상-류동훈 열사비 앞에 서서
칼데아인의 밤
용산역
광장의 시간-토요혁명에 부쳐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
무명 가수를 위하여

3부
반복의 노래
식물들의 외로움
연기 수업
거미
월드컵 축구
방어(?魚)
복면
소낙비
충주역
운명 교향곡
개불알꽃
무제
심장의 노래

4부
야외 수업
영동시편-최하림 시인에게
Untitled
태백산 시론(詩論)
대명매(大明梅)
일지암 가는 길-가수 박양희 후배에게
몽탄역
역사 앞에서
폭풍이 오기 전
거문도 등대

해설 | 노지영(문학평론가)
벌거벗은 것들이 너를 부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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