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기자와 교회 목사 두 사람이 만났다. 한겨레신문 기자였던 손석춘 기자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두 사람간의 대화다. 한명숙 전총리가 추천사를 써줄만큼 책 내용은 알차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각각 언론과 종교의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다. 사회비평에 관심이 있고 현 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일독을 추천하고 싶다.
나도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늘 자신없다. 시간이 갈수록, 비판적인 시각은 사그라들고 막중한 책임감만이 더 무겁게 지워지는 듯 느끼기 때문이다. 자폐적인 종교관과 신앙관 속에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불의한 체제와 불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불화를 위한 불화가 아니라 진정한 일치를 위한 방법적 불화겠지요.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를 치유해주고, 안전지대로 옮겨주는 것도 물론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 길에 강도가 출몰하지 않도록 하고, 강도가 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지요" (87쪽, 김기석 목사 글)
나는 이 대목에서 요즘 말로 심쿵하였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핵심적인 메시지를, 그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잘 돌보고 도와주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이웃이 되어주라는 정도로만 새겼었다. 근데,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할 바, 아니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사회구조와 체제에 대한 개선의 사명과 의지가 있었구나, 그 부분들을 상실해 버렸구나 생각했다.
손석춘 기자의 표현을 빈다면,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즉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방해하는 세력이 있다. 그들은 정치/경제/언론권력을 지니고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킨다. 손석춘 기자는 우리가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그 핵심은, 민중의 슬기에 있다고 한다.
"첫째, 민중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슬기입니다. 무릇 더듬이로 자기 앞 길을 끊임없이 열어가는 연체동물이 그렇듯이 모든 생명체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정확히 인식하는 일은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슬기 라 하는 까닭은 끊임없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정치권력, 경제권력, 언론권력을 지니고 있어서입니다. ...................
둘째, 민중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과 다른 사회,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슬기입니다. .....잘못된 현실을 직시한다면 마땅히 그 현실을 바꾸려는 게 본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럼에도 그것을 슬기 라 하는 까닭은 새로운 사회가 가능하다고 인식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세력이 정치권력, 경제권력, 언론권력이 지니고 있어서입니다............
셋째, 민중이 자신이 확신하는 새로운 사회를 자신의 실천으로 창조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슬기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한 번뿐이기에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싶은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슬기 라 하는 까닭은 민중이 새로운 사회의 실현에 나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정치권력, 경제권력, 언론권력을 지니고 있어서입니다." (70~71쪽, 손석춘 기자 글)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의 신앙생활 내지 종교생활이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신앙을 일상과 유리된 특별한 뭔가로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을 바라본다고 말하면서 발은 땅에서 떨어져 건들건들거립니다. (195쪽, 김기석 목사 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대한 정확한 성찰도 없고, 그러다보니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사명의 삶이 주어졌는지 고민하는 것도 부족하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죄 에 대해 너무 막연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내세지향적인 보상개념으로서의 영생 을 지향하다보니 개인의 죄에 대한 성결만을 강조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죄의 문제는 물론 심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온통 죄와 용서의 문제로 도배가 된 텍스트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죄는 인간의 삶의 조건 혹은 인간이 처한 곤경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은유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처한 다양한 문제 상황을 ‘죄’라는 단어 속에 뭉뚱그릴 때 성경이 내장하고 있는 혁명적 메시지는 소거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는 것은 개인의 내면에 깃든 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는 것은 개인의 죄성만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억압, 경제적 수탈, 문화적 인종적 차별,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드는 일체의 장애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세상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입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쳐도 그럴 수 없는 구조가 온존해 있다면 죄의 용서를 말하는 기독교의 담론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204~205쪽, 김기석 목사 글)
“...애매하고 추상적인 죄, 원죄, 종교적인 죄가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회오리치는 구체적인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죄들을 고백하고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마음 아파하며, 그것들을 넘어서는 다른 삶의 방식들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크든 작든 그것을 실천해 나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자고 호소하며 설교를 맺더군요” (221쪽, 손석춘 기자 글)
죄에 대하여, 죄에 대한 구속의 은총에 대하여는 정말 많이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죄를 사하는 그리스도의 보혈 역시 마찬가지다. 근데, 다음 글을 읽으면서,"죄를 사한다, 죄를 용서한다, 죄로부터 건지신다"라는 교리적 고백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되었다. 또한"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은총과 능력"이라는 교리적 고백 역시, 더 깊은 울림으로 의미를 새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말을 해석 없이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는 태도입니다. 예수의 피에 무슨 마술적 능력이 있어서 우리 죄를 없이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피로 고쳐날 때뿐입니다. 예수의 피가 내 속에 흘러 내가 예수적 존재로 거듭날 때 비로소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18쪽, 김기석 목사 글)
우리는 눈물도 말랐거니와 피는 더욱 말랐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빈혈 병자가 되었습니다.
피가 없을 때는 기운이 없고, 맥없고, 힘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그 대신 노랗고, 겁 많고, 쓸쓸하고,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주사해 주소서.
그래서 우리는 새 기운을 얻고 화기와 생기 있고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에게 잡히어 죽어 가되, 그 죄가 더불어 싸울만한 피가 없습니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유린하되, 그것을 분히 여기는 피가 없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주사해 주옵소서. 그래서 죄악과 더불어 싸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이 원수 마귀를 격파하게 하여 주옵소서. 피가 있게 하소서.
피가 없으면 죽은사람-우리에게는 피가 없어요.
주여, 우리는 기이 죽게 되었나이다.
당신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써 우리에게 주사해 주옵소서.
(318~319쪽, 김기석 목사가 인용한 이용도 목사의 기도)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대화 주제 중, 주기도문에 나오는 "죄의 용서" 기도가, 고전어 원어 본문의 의미로는 "빚의 탕감"이었다는 부분이 있다. 현실적으로 보다 분명하게 와닿는 "빚"이라는 낱말을, 누가 왜 애매모호한 "죄"라고 해석하였는지, 그러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현저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통해 빚의 탕감에 대해 가르치신 것은, 당시 팔레스틴 민중의 삶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들의 경전인 토라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한다. 김기석 목사는 토라 즉 율법의 핵심을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이어지는 절기에 있다고 본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의 회복입니다. 물론 그 정의는 사법적 정의라기 보다는 분배적 정의겠지요. (164쪽, 김기석 목사 글)
주기도문에 나오는 죄의 용서 는 그런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단다. 그러고보면,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교계는, 오늘날 사회체제와 구조에 대해 무관심한듯 보인다. 아니, 내가 그랬다. 정치, 사회, 사회구조, 체제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깊이 반성하게 된다.
책을 끝까지 읽고 마지막장을 덮을 때,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다. 두분의 대화 속에서 도전받은 감명에 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는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과 소망은 있다. 예수님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는 없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무능은 사실 그분께 함부로 와 억지로 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옳은 일이라 하여 누구를 강제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강제는 자유의 박탈이니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백성들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80쪽, 김기석 목사 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란 질문보다, 지금 나는 영적인 존재로 살고 있는가 하는 자아성찰적 질문이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다시 말하면 영적인 존재답게 사는 길을 몸소 솔선수범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가고자 날마다 예수의 제자로 살기를 결단하며 따르는 길에만 전념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셋 모이다보면, 어느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갈 것이고, 우리는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 고백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자기중심적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가 자기중심성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이기심과 탐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이타적 존재가 되려는 결단 속에서 구성됩니다. (275쪽, 김기석 목사 글)
종교가 다시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다!
목회자와 언론인이 나눈 눈부신 영적 대화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는 신학과 삶이 무르익은 글쓰기와 설교로 잘 알려진 목회자 김기석과 언론인이자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을 지낸 손석춘의 맑은 꿈이 영그는 대화로 가득하다. 기독교의 현실은 암울하지만 ‘종교’가 아니 기독교가 다시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교회와 신학은 물론 불교 등 이웃 종교, 철학과 과학을 포함한 인문학 등의 범주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 문명이 나아갈 길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본이 자본을 낳는 구조 속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다. 사랑과 정의라는 희망을 찾기 위해 두 사람은 우리 시대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서로에게 질문하며 해답을 찾아간다.
두 사람의 대화는 교회와 기독교를 넘어 문화와 문명 비평 등을 포괄하면서도, 매순간 문학적 향기와 인문학적 우정을 놓치지 않는다. 논리적 서술이 앞세우면서도, 삶을 체득한 문학적 역량을 순간순간 특유의 마중물을 통해 길어 올린 것이다. 종교는 여전히 우리에게 삶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는 근원적 힘임을 증명한다.
추천사 | 한국교회와 사회의 희망을 잉태하기를 | 한명숙
들어가는 말 | 하늘로부터 어떤 기척을 기다리며 | 김기석
사랑의 길, 자본의 길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의 길 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그것’ 세상을 넘어서려면
어느 60대의 ‘천국’ 가는 희망
하늘의 길은 땅의 길과 이어져 있다
누가 ‘빚의 탕감’을 ‘죄의 용서’로 비틀었는가
교회는 자동세탁기가 아니다
돈과 예수, 그리고 죄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듯
‘원죄’의 원죄와 새로운 사회
우리는 지지 않는다
빚의 기도, 사랑의 실천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새로운 사람의 길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나가는 말 | 신에게도 ‘지옥’이었을 ‘인간에 대한 사랑’ | 손석춘
김기석 목사님 그리고 손석춘 선생님께(1) | 나의 교회야, 나의 교회야 | 김인국
김기석 목사님 그리고 손석춘 선생님께(2) | 인간적 향기가 물씬 풍긴 두 분의 영적 감성|한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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